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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플레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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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산더 플레밍은 1881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세균학자이자 약리학자로, 리소자임과 페니실린을 발견하여 현대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세인트 메리 병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알름로스 라이트 경의 조수로 일하며 세균학 연구를 시작했다. 1920년대 우연한 계기로 리소자임과 페니실린을 발견했으며, 특히 페니실린은 하워드 플로리와 에른스트 체인에 의해 대량 생산되어 항생제 시대를 열었다. 플레밍은 1945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으며, 페니실린 발견의 공로가 과장되었다는 비판과 윈스턴 처칠과의 관계에 대한 오해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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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플레밍
기본 정보
플레밍이 연구실에서, 1943년경
이름알렉산더 플레밍
출생일1881년 8월 6일
출생지스코틀랜드 이스트에어셔 다벨
사망일1955년 3월 11일
사망지잉글랜드 런던
국적영국
직업의사, 미생물학자
학력왕립 폴리테크닉 기관
세인트 메리 병원 의과대학
웨스트민스터 대학교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소속런던 세인트 메리 병원
연구 분야
분야세균학
면역학
주요 업적리소자임 발견
페니실린 발견
결혼 및 가족
배우자세라 마리온 맥엘로이 (1915년 결혼, 1949년 사망)
아말리아 플레밍 (1953년 결혼)
수상
수상 내역노벨 생리학·의학상 (1945년)
에든버러 대학교 치료학 카메론 상 (1945년)
액토니언 상 (1949년)
기타
알렉산더 플레밍 서명
영향하워드 플로리
에른스트 보리스 체인
소속 학회왕립 학회 (FRS)
왕립 에든버러 학회 (FRSE)
왕립 외과 대학 (FRCS)

2. 생애

알렉산더 플레밍은 1881년 8월 6일 스코틀랜드 에어셔주(에어셔주) 다벨(다벨) 근처 로크필드 농장에서 농부 휴 플레밍(Hugh Fleming)과 그레이스 스털링 모턴(Grace Stirling Morton)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자녀 중 셋째였다. 휴 플레밍은 첫 번째 결혼에서 네 명의 자녀를 두었고, 알렉산더가 7살 때 사망했다.[11]

플레밍은 라우던 무어 스쿨(Loudoun Moor School)과 다벨 스쿨(Darvel School)에 다녔고, 킬마녹 아카데미(킬마녹 아카데미)에서 2년간 장학금을 받았다.[7] 그 후 런던으로 이주하여 로열 폴리테크닉 연구소(로열 폴리테크닉 연구소)에서 공부했다.[7] 4년간 선적 사무실에서 일한 후, 20세의 알렉산더 플레밍은 삼촌 존 플레밍(John Fleming)으로부터 상당한 돈을 상속받았다. 그의 형 톰은 알렉산더에게 의사가 될 것을 제안했고, 1903년 알렉산더는 패딩턴(패딩턴)에 있는 세인트 메리 병원 의과대학(세인트 메리 병원 의과대학)(현재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의 일부)에 입학하여 1906년 우등으로 MBBS 학위를 받았다.[11]

1900년부터[3] 1914년까지[8] 자원군(자원군) 런던 스코틀랜드 연대(런던 스코틀랜드 연대)의 이병(이병)이었던 플레밍은 의과대학의 사격 클럽 회원이었다. 클럽 주장은 플레밍을 팀에 남기기 위해 그에게 세인트 메리 병원의 연구 부서에 합류할 것을 제안했고, 그는 백신 요법과 면역학의 선구자인 알름로스 라이트 경(알름로스 라이트)의 조수 세균학자가 되었다. 1908년 그는 세균학(세균학)으로 금메달을 받고 BSc 학위를 받았고, 1914년까지 세인트 메리 병원에서 강사로 일했다.

1906년 8월 6일에 세인트 메리병원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의학 면허를 취득하였으며 곧 세인트 메리 병원의 앰로스 라이트(Almroth Wright영어)의 예방 접종과에 합류하였다. 앰로스 라이트는 백신 치료와 면역학의 개혁자이며, 특히 1898년장티푸스 백신 개발로 유명하다. 훗날 이 연구소는 라이트-플레밍연구소로 다시 이름이 지어졌다.

플레밍이 있던 예방 접종과는 매우 열정적이었지만, 당시 전체적인 연구소의 환경은 매우 열악하였다. 세인트 메리 병원에서 연구 환경이 괜찮은 편에 속하던 예방 접종과도 연구실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으며, 교수인 라이트조차도 개인 연구실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플레밍을 포함한 라이트 실험실의 연구원들은 각자 개인적으로 환자를 치료하여 돈을 벌어야만 하였다.

그는 MBBS(기초의사학위)를 1906년에 취득하였고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까지 세인트메리 병원에서 선생님으로 일하였다.

플레밍은 의과대학의 사격 클럽 회원이었다. 1900년부터 1914년까지 자원군(자원군) 런던 스코틀랜드 연대(런던 스코틀랜드 연대)의 이병(이병)이었던 플레밍은 클럽 주장의 제안으로 세인트 메리 병원의 연구 부서에 합류하여 백신 요법과 면역학의 선구자인 알름로스 라이트 경(알름로스 라이트)의 조수 세균학자가 되었다. 1908년 그는 세균학(세균학)으로 금메달을 받고 BSc 학위를 받았고, 1914년까지 세인트 메리 병원에서 강사로 일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 플레밍은 영국군(왕립군사의무단)에 입대하여 다른 많은 그의 동료와 함께 프랑스의 야전병원에서 의무장교로 근무했다. 당시 그는 전장에서 상처가 썩어 들어가는 부상자들을 위해 볼로냐카지노에 설치된 특별 연구실에서 소독약 및 방부외과기술에 대해서 연구하였다.[107] 1915년 휴가 중에, 그는 ‘사린’으로 불리기를 좋아했던 간호사 사라 맥엘로이와 결혼했다. 그녀는 내성적인 플레밍과는 정반대로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고, 그녀의 쌍둥이 자매 엘리자베스와 요양원을 운영했다.

1914년 소위로 임관되어 1917년 대위로 진급한[8] 플레밍은 제1차 세계 대전(제1차 세계 대전) 내내 왕립 육군 의무대(왕립 육군 의무대)에서 복무했으며, 훈장을 받았다. 그와 그의 많은 동료들은 프랑스 서부 전선의 야전 병원에서 일했다.

1918년 그는 세인트 메리 병원(세인트 메리 병원)으로 돌아왔고, 1928년 런던 대학교(런던 대학교)의 세균학 교수로 선출되었다. 1951년 에든버러 대학교(에든버러 대학교)의 총장으로 3년 임기로 선출되었다.[11]

1918년에 세인트 메리 병원으로 돌아와 교수가 되었으며(Professor Medicine), 1919년에는 왕립의과협회의 헌터좌교수가 되었다.[106] 이후 플레밍은 면역학, 세균학, 화학요법 분야에서 많은 연구를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실패만 계속되는 소독약 및 방부외과분야에, 플레밍의 리소자임 발견은 전환점을 가져오게 된다. 리소자임은 플레밍에 의해 콧물 속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대부분의 업적은 플레밍에 의해 이루어졌다. 플레밍은 이후 페니실린 발견 이후에도 리소자임이 페니실린보다도 더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928년에 플레밍은 세인트 메리 병원 예방 접종과의 세균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과의 부책임자가 되었다. 플레밍은 그 해에 페니실린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영국실험병리학회지』에「B-인플루엔자 분리에 이용된 페니실륨 곰팡이의 항세균 작용에 대하여」라는 논문으로 1929년에 발표되었다. 하지만 이전에 발견한 생물체 내에서의 자연 방어 물질인 리소자임의 병원균에 대한 낮은 항생 능력은 플레밍이 화학요법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갖게 하였다. 또한 당시 페니실린에 관련된 화학요법이 의학 문제에 어떤 해결책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 자체는 이후 항생제 분야에서 아주 큰 역할을 하게 된다.[106] 1932년에 플레밍은 페니실린에 대한 연구를 포기한다. 그는 이후의 페니실린 및 항생제의 연구에 단지 다른 연구자들에게 자신이 배양한 균주를 주는 일밖에 하지 않았다. 플레밍은 자신이 화학요법을 연구할 만한 화학적 전문성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고, 앞에서 언급하였듯 화학요법은 심각한 감염을 치료할 만한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페니실린의 연구는 후에 다른 연구자들에게 넘어가게 된다. 1939년에 플레밍의 균주 표본은 하워드 플로리가 이끄는 옥스퍼드 대학교 연구팀에서 중요한 연구가 수행된다.

플레밍은 1943년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44년에는 기사작위를 받았다.[106] 1945년에는 하워드 플로리, 에른스트 체인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1946년에는 앰로스 라이트의 뒤를 이어 실험실 책임자가 되었으며 1948년에는 라이트-플레밍 연구소의 책임자가 되었다. 1948년에 아내인 사라 맥엘로이가 죽은 후 1953년에 동료인 아말리아 보레카와 결혼하였다.

런던 세인트폴 대성당 지하 묘지에 있는 알렉산더 플레밍 경의 묘


1915년 12월 24일, 플레밍은 아일랜드 메이요주 킬랄라 출신의 간호사인 사라 매리언 맥엘로이와 결혼했습니다. 그들의 외아들인 로버트 플레밍(1924~2015)은 일반의가 되었습니다. 플레밍은 1949년 첫 번째 부인이 사망한 후 1953년 4월 9일 세인트 메리 병원의 동료이자 그리스인인 아말리아 쿠추리-부레카스와 재혼했으며, 그녀는 1986년에 사망했습니다.[75]

플레밍은 장로교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첫 번째 부인 사라는 (탈락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는 특별히 종교적이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의 아들 로버트는 나중에 성공회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부모로부터 상당히 비종교적인 성향을 물려받았다고 전해집니다.[76]

플레밍은 1944년 로버트 D. 코길과 앤드류 J. 모이어가 미국에서 페니실린 생산 방법에 대한 특허를 취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77] 격분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는 페니실린을 발견하여 인류의 이익을 위해 무료로 제공했습니다. 왜 다른 나라 제조업체들의 이윤 추구 독점이 되어야 합니까?[12]
1921년부터 1955년 사망할 때까지 플레밍은 서퍽주 바턴 밀스에 "더 둔"이라는 시골집을 소유했습니다.[2][78]

알렉산더 플레밍은 1955년 3월 11일 런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세인트폴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79]

2. 1. 초년 (1881년 ~ 1918년)

알렉산더 플레밍은 1881년 8월 6일 스코틀랜드 에어셔주(에어셔주) 다벨(다벨) 근처 로크필드 농장에서 농부 휴 플레밍(Hugh Fleming)과 그레이스 스털링 모턴(Grace Stirling Morton)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자녀 중 셋째였다. 휴 플레밍은 첫 번째 결혼에서 네 명의 자녀를 두었고, 알렉산더가 7살 때 사망했다.[11]

플레밍은 라우던 무어 스쿨(Loudoun Moor School)과 다벨 스쿨(Darvel School)에 다녔고, 킬마녹 아카데미(킬마녹 아카데미)에서 2년간 장학금을 받았다.[7] 그 후 런던으로 이주하여 로열 폴리테크닉 연구소(로열 폴리테크닉 연구소)에서 공부했다.[7] 4년간 선적 사무실에서 일한 후, 20세의 알렉산더 플레밍은 삼촌 존 플레밍(John Fleming)으로부터 상당한 돈을 상속받았다. 그의 형 톰은 알렉산더에게 의사가 될 것을 제안했고, 1903년 알렉산더는 패딩턴(패딩턴)에 있는 세인트 메리 병원 의과대학(세인트 메리 병원 의과대학)(현재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의 일부)에 입학하여 1906년 우등으로 MBBS 학위를 받았다.[11]

1900년부터[3] 1914년까지[8] 자원군(자원군) 런던 스코틀랜드 연대(런던 스코틀랜드 연대)의 이병(이병)이었던 플레밍은 의과대학의 사격 클럽 회원이었다. 클럽 주장은 플레밍을 팀에 남기기 위해 그에게 세인트 메리 병원의 연구 부서에 합류할 것을 제안했고, 그는 백신 요법과 면역학의 선구자인 알름로스 라이트 경(알름로스 라이트)의 조수 세균학자가 되었다. 1908년 그는 세균학(세균학)으로 금메달을 받고 BSc 학위를 받았고, 1914년까지 세인트 메리 병원에서 강사로 일했다.

1906년 8월 6일에 세인트 메리병원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의학 면허를 취득하였으며 곧 세인트 메리 병원의 앰로스 라이트(Almroth Wright영어)의 예방 접종과에 합류하였다. 앰로스 라이트는 백신 치료와 면역학의 개혁자이며, 특히 1898년장티푸스 백신 개발로 유명하다. 훗날 이 연구소는 라이트-플레밍연구소로 다시 이름이 지어졌다.

플레밍이 있던 예방 접종과는 매우 열정적이었지만, 당시 전체적인 연구소의 환경은 매우 열악하였다. 세인트 메리 병원에서 연구 환경이 괜찮은 편에 속하던 예방 접종과도 연구실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으며, 교수인 라이트조차도 개인 연구실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플레밍을 포함한 라이트 실험실의 연구원들은 각자 개인적으로 환자를 치료하여 돈을 벌어야만 하였다.

그는 MBBS(기초의사학위)를 1906년에 취득하였고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까지 세인트메리 병원에서 선생님으로 일하였다.

플레밍은 의과대학의 사격 클럽 회원이었다. 1900년부터 1914년까지 자원군(자원군) 런던 스코틀랜드 연대(런던 스코틀랜드 연대)의 이병(이병)이었던 플레밍은 클럽 주장의 제안으로 세인트 메리 병원의 연구 부서에 합류하여 백신 요법과 면역학의 선구자인 알름로스 라이트 경(알름로스 라이트)의 조수 세균학자가 되었다. 1908년 그는 세균학(세균학)으로 금메달을 받고 BSc 학위를 받았고, 1914년까지 세인트 메리 병원에서 강사로 일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 플레밍은 영국군(왕립군사의무단)에 입대하여 다른 많은 그의 동료와 함께 프랑스의 야전병원에서 의무장교로 근무했다. 당시 그는 전장에서 상처가 썩어 들어가는 부상자들을 위해 볼로냐카지노에 설치된 특별 연구실에서 소독약 및 방부외과기술에 대해서 연구하였다.[107] 1915년 휴가 중에, 그는 ‘사린’으로 불리기를 좋아했던 간호사 사라 맥엘로이와 결혼했다. 그녀는 내성적인 플레밍과는 정반대로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고, 그녀의 쌍둥이 자매 엘리자베스와 요양원을 운영했다.

1914년 소위로 임관되어 1917년 대위로 진급한[8] 플레밍은 제1차 세계 대전(제1차 세계 대전) 내내 왕립 육군 의무대(왕립 육군 의무대)에서 복무했으며, 훈장을 받았다. 그와 그의 많은 동료들은 프랑스 서부 전선의 야전 병원에서 일했다.

1918년 그는 세인트 메리 병원(세인트 메리 병원)으로 돌아왔고, 1928년 런던 대학교(런던 대학교)의 세균학 교수로 선출되었다. 1951년 에든버러 대학교(에든버러 대학교)의 총장으로 3년 임기로 선출되었다.[11]

2. 1. 1. 유년 및 청년기

알렉산더 플레밍은 1881년 8월 6일 스코틀랜드 에어셔주(에어셔주) 다벨(다벨) 근처 로크필드 농장에서 농부 휴 플레밍(Hugh Fleming)과 그레이스 스털링 모턴(Grace Stirling Morton)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자녀 중 셋째였다. 휴 플레밍은 첫 번째 결혼에서 네 명의 자녀를 두었고, 알렉산더가 7살 때 사망했다.[11]

플레밍은 라우던 무어 스쿨(Loudoun Moor School)과 다벨 스쿨(Darvel School)에 다녔고, 킬마녹 아카데미(킬마녹 아카데미)에서 2년간 장학금을 받았다.[7] 그 후 런던으로 이주하여 로열 폴리테크닉 연구소(로열 폴리테크닉 연구소)에서 공부했다.[7] 4년간 선적 사무실에서 일한 후, 20세의 알렉산더 플레밍은 삼촌 존 플레밍(John Fleming)으로부터 상당한 돈을 상속받았다. 그의 형 톰은 알렉산더에게 의사가 될 것을 제안했고, 1903년 알렉산더는 패딩턴(패딩턴)에 있는 세인트 메리 병원 의과대학(세인트 메리 병원 의과대학)(현재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의 일부)에 입학하여 1906년 우등으로 MBBS 학위를 받았다.[11]

1900년부터[3] 1914년까지[8] 자원군(자원군) 런던 스코틀랜드 연대(런던 스코틀랜드 연대)의 이병(이병)이었던 플레밍은 의과대학의 사격 클럽 회원이었다. 클럽 주장은 플레밍을 팀에 남기기 위해 그에게 세인트 메리 병원의 연구 부서에 합류할 것을 제안했고, 그는 백신 요법과 면역학의 선구자인 알름로스 라이트 경(알름로스 라이트)의 조수 세균학자가 되었다. 1908년 그는 세균학(세균학)으로 금메달을 받고 BSc 학위를 받았고, 1914년까지 세인트 메리 병원에서 강사로 일했다.

1914년 소위로 임관되어 1917년 대위로 진급한[8] 플레밍은 제1차 세계 대전(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왕립 육군 의무대(왕립 육군 의무대)에서 복무했으며, 훈장을 받았다. 그와 그의 많은 동료들은 프랑스 서부 전선(서부 전선)의 야전 병원에서 일했다.

1918년 그는 세인트 메리 병원(세인트 메리 병원)으로 돌아왔고, 1928년 런던 대학교(런던 대학교)의 세균학 교수로 선출되었다. 1951년 에든버러 대학교(에든버러 대학교)의 총장으로 3년 임기로 선출되었다.[11]

2. 1. 2. 의학 공부 및 연구원

1906년 8월 6일에 세인트 메리병원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의학 면허를 취득하였으며 곧 세인트 메리 병원의 앰로스 라이트(Almroth Wright영어)의 예방 접종과에 합류하였다. 앰로스 라이트는 백신 치료와 면역학의 개혁자이며, 특히 1898년장티푸스 백신 개발로 유명하다. 훗날 이 연구소는 라이트-플레밍연구소로 다시 이름이 지어졌다.

플레밍이 있던 예방 접종과는 매우 열정적이었지만, 당시 전체적인 연구소의 환경은 매우 열악하였다. 세인트 메리 병원에서 연구 환경이 괜찮은 편에 속하던 예방 접종과도 연구실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으며, 교수인 라이트조차도 개인 연구실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플레밍을 포함한 라이트 실험실의 연구원들은 각자 개인적으로 환자를 치료하여 돈을 벌어야만 하였다.

그는 MBBS(기초의사학위)를 1906년에 취득하였고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까지 세인트메리 병원에서 선생님으로 일하였다.

플레밍은 의과대학의 사격 클럽 회원이었다. 1900년부터 1914년까지 자원군(자원군) 런던 스코틀랜드 연대(런던 스코틀랜드 연대)의 이병(이병)이었던 플레밍은 클럽 주장의 제안으로 세인트 메리 병원의 연구 부서에 합류하여 백신 요법과 면역학의 선구자인 알름로스 라이트 경(알름로스 라이트)의 조수 세균학자가 되었다. 1908년 그는 세균학(세균학)으로 금메달을 받고 BSc 학위를 받았고, 1914년까지 세인트 메리 병원에서 강사로 일했다.

2. 1. 3.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4 ~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 플레밍은 영국군(왕립군사의무단)에 입대하여 다른 많은 그의 동료와 함께 프랑스의 야전병원에서 의무장교로 근무했다. 당시 그는 전장에서 상처가 썩어 들어가는 부상자들을 위해 볼로냐카지노에 설치된 특별 연구실에서 소독약 및 방부외과기술에 대해서 연구하였다.[107] 1915년 휴가 중에, 그는 ‘사린’으로 불리기를 좋아했던 간호사 사라 맥엘로이와 결혼했다. 그녀는 내성적인 플레밍과는 정반대로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고, 그녀의 쌍둥이 자매 엘리자베스와 요양원을 운영했다.

1914년 소위로 임관되어 1917년 대위로 진급한[8] 플레밍은 제1차 세계 대전(제1차 세계 대전) 내내 왕립 육군 의무대(왕립 육군 의무대)에서 복무했으며, 훈장을 받았다. 그와 그의 많은 동료들은 프랑스 서부 전선의 야전 병원에서 일했다.

2. 2. 활동기 (1919 ~ 1955년)

1918년에 세인트 메리 병원으로 돌아와 교수가 되었으며(Professor Medicine), 1919년에는 왕립의과협회의 헌터좌교수가 되었다.[106] 이후 플레밍은 면역학, 세균학, 화학요법 분야에서 많은 연구를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실패만 계속되는 소독약 및 방부외과분야에, 플레밍의 리소자임 발견은 전환점을 가져오게 된다. 리소자임은 플레밍에 의해 콧물 속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대부분의 업적은 플레밍에 의해 이루어졌다. 플레밍은 이후 페니실린 발견 이후에도 리소자임이 페니실린보다도 더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928년에 플레밍은 세인트 메리 병원 예방 접종과의 세균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과의 부책임자가 되었다. 플레밍은 그 해에 페니실린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영국실험병리학회지』에「B-인플루엔자 분리에 이용된 페니실륨 곰팡이의 항세균 작용에 대하여」라는 논문으로 1929년에 발표되었다. 하지만 이전에 발견한 생물체 내에서의 자연 방어 물질인 리소자임의 병원균에 대한 낮은 항생 능력은 플레밍이 화학요법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갖게 하였다. 또한 당시 페니실린에 관련된 화학요법이 의학 문제에 어떤 해결책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 자체는 이후 항생제 분야에서 아주 큰 역할을 하게 된다.[106] 1932년에 플레밍은 페니실린에 대한 연구를 포기한다. 그는 이후의 페니실린 및 항생제의 연구에 단지 다른 연구자들에게 자신이 배양한 균주를 주는 일밖에 하지 않았다. 플레밍은 자신이 화학요법을 연구할 만한 화학적 전문성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고, 앞에서 언급하였듯 화학요법은 심각한 감염을 치료할 만한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페니실린의 연구는 후에 다른 연구자들에게 넘어가게 된다. 1939년에 플레밍의 균주 표본은 하워드 플로리가 이끄는 옥스퍼드 대학교 연구팀에서 중요한 연구가 수행된다.

플레밍은 1943년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44년에는 기사작위를 받았다.[106] 1945년에는 하워드 플로리, 에른스트 체인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1946년에는 앰로스 라이트의 뒤를 이어 실험실 책임자가 되었으며 1948년에는 라이트-플레밍 연구소의 책임자가 되었다. 1948년에 아내인 사라 맥엘로이가 죽은 후 1953년에 동료인 아말리아 보레카와 결혼하였다.

1915년 12월 24일, 플레밍은 아일랜드 메이요주 킬랄라 출신의 간호사인 사라 매리언 맥엘로이와 결혼했습니다. 그들의 외아들인 로버트 플레밍(1924~2015)은 일반의가 되었습니다. 플레밍은 1949년 첫 번째 부인이 사망한 후 1953년 4월 9일 세인트 메리 병원의 동료이자 그리스인인 아말리아 쿠추리-부레카스와 재혼했으며, 그녀는 1986년에 사망했습니다.[75]

플레밍은 장로교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첫 번째 부인 사라는 (탈락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는 특별히 종교적이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의 아들 로버트는 나중에 성공회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부모로부터 상당히 비종교적인 성향을 물려받았다고 전해집니다.[76]

플레밍은 1944년 로버트 D. 코길과 앤드류 J. 모이어가 미국에서 페니실린 생산 방법에 대한 특허를 취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77] 격분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는 페니실린을 발견하여 인류의 이익을 위해 무료로 제공했습니다. 왜 다른 나라 제조업체들의 이윤 추구 독점이 되어야 합니까?[12]
1921년부터 1955년 사망할 때까지 플레밍은 서퍽주 바턴 밀스에 "더 둔"이라는 시골집을 소유했습니다.[2][78]

2. 3. 사후

알렉산더 플레밍은 1955년 3월 11일 런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세인트폴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79]

3. 연구 업적

플레밍은 1920년대에 항균성을 가진 두 가지 물질, 리소자임페니실린을 발견했다. 두 발견 모두 우연한 발견(세렌디피티(serendipity))으로 알려져 있다.[101]

플레밍의 페니실린 발견을 기념하는 기념패, 런던 세인트 메리 병원(St Mary's Hospital, London)


== 리소자임 ==

1921년 플레밍은 라는 논문에서 리소자임이라는 항생 물질을 발표했다.[13]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발견한 후에도 여전히 리소자임이 페니실린보다 더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20]

=== 정의 ===

리소자임세포벽에 있는 펩티도글리칸가수분해하는 항균 효소이며 동물의 조직, 침, 눈물, 알의 흰자 따위에 들어있다.

=== 발견 과정 ===

1921년 플레밍은 라는 논문에서 리소자임이라는 항생 물질을 발표했다.[13] 플레밍은 리소자임 발견 이전에는 미생물이 동물의 체내에 들어올 경우, 결코 공격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리소자임은 콧물 속에서 처음 발견되었는데, 사람과 동물에서 분비되는 점액 속에 포함되어 있는 효소로 체내의 자연 방어 체계 중 하나이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발견한 후에도 여전히 리소자임이 페니실린보다 더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20]

모루아가 쓴 플레밍의 전기에서 플레밍의 조수의 말을 인용한 바에 따르면,[112] 플레밍은 감기에 걸렸을 때의 콧물을 노란색 군체의 미생물에 첨가하였다. 그는 몇 개의 배양접시를 씻던 도중 노란색 군체의 미생물의 한쪽에 미생물이 없는 부분을 발견하였고, 그 안의 미생물은 반투명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분해 중인 미생물이 보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플레밍은 자신이 첨가한 점액 속에 주위에 있는 미생물을 분해시킬 수 있는 물질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였다.

리소자임의 발견에서 플레밍에게 실망스러웠던 점은 외부에서 공급된 미생물인 마이크로코쿠스 리소데익티쿠스가 독성이 없는 세균이라는 점이었다. 즉, 리소자임은 독성이 없는 세균에는 효과가 있지만 독성 세균에는 그 효과가 거의 없다. 플레밍은 이후에 리소자임이 무엇인지 규명하고, 그 기작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리소자임 발견 경험은 6년 후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리소자임 자체의 낮은 항생 능력은 플레밍이 화학요법에 대해 좁은 시각을 갖도록 하기도 하여서 페니실린 발견 이후에 페니실린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한 부분도 있다.

플레밍은 리소자임의 발견과 함께 인간의 혈액과 다른 체액의 민감성 적정 실험과 정량 방법을 고안하여 나중에 페니실린의 적정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당시 그의 연구 조교였던 V. D. 앨리슨의 회상에 따르면, 플레밍은 깔끔한 연구자는 아니었고, 배양 접시에서 보통 예상치 못한 박테리아 성장을 기대했다고 한다. 플레밍은 앨리슨을 "실험실에서의 지나친 깔끔함" 때문에 놀렸고, 앨리슨은 그러한 깔끔하지 못함이 플레밍의 실험 성공의 요인이라고 생각하며, "[만약] 그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깔끔했더라면, 그는 그의 두 가지 위대한 발견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12]

1921년 후반, 플레밍이 박테리아를 위한 한천 배지를 관리하던 중, 한 접시가 공기 중 박테리아에 오염된 것을 발견했다. 그는 비강 점액을 첨가했고, 점액이 박테리아 성장을 억제한다는 것을 알았다.[13] 점액 주변에는 투명한 원형(점액으로부터 1cm)이 있었는데, 이는 박테리아의 사멸대를 나타내고, 그 너머에는 유리처럼 반투명한 고리와 그 너머로 정상적인 박테리아 성장을 나타내는 불투명한 영역이 있었다. 신선한 점액을 첨가한 지 2분 이내에 노란색 식염수는 완전히 투명해졌다. 그는 동료들이 제공한 눈물을 사용하여 실험을 확장했다. 앨리슨은 "다음 5~6주 동안, 우리의 눈물은 이 놀라운 현상의 공급원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기 위해 (양파 실패 후) 우리가 사용한 레몬이 많았습니다... 우리의 눈물에 대한 수요가 너무 커서, 실험실 보조원들이 징집되어, 기여할 때마다 3펜스를 받았습니다."라고 회상했다.[12]

타액, 연골, 혈액, 정액, 난소낭종액, 고름, 달걀 흰자를 사용한 그의 추가 실험은 살균제가 이 모든 것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25] 그는 1921년 12월 의학 연구 클럽 앞에서, 그리고 다음 해 왕립 학회 앞에서 그의 발견을 보고했지만, 앨리슨이 회상했듯이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했다. 앨리슨은 "저는 플레밍의 손님으로 이 [의학 연구 클럽]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그의 발견을 설명하는 논문은 질문도 토론도 없이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며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졌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음 해에 그는 피카딜리 버링턴 하우스 왕립 학회 앞에서 이 주제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고, 그와 저는 우리의 연구를 시연했습니다. 한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논평이나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라고 회상했다.[12]

1922년 5월 1일자 ''왕립학회 철학회보 B: 생물과학''에 "조직과 분비물에서 발견된 놀라운 용균 요소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보고하면서 플레밍은 "이 논문에서 저는 신체의 조직과 분비물에 존재하는 특정 박테리아를 빠르게 용해할 수 있는 물질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 물질은 효소와 유사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는 이것을 "리소자임"이라고 불렀고, 이 논문 전체에서 이 이름으로 언급하겠습니다. 리소자임은 급성 코감기를 앓고 있는 환자에 대한 일부 연구 중에 처음 발견되었습니다."라고 썼다.[13]

플레밍은 앨리슨과 함께 같은 해 1922년 10월 ''영국 실험 병리학 저널''에 리소자임에 대한 추가 연구를 발표했다.[14] 계란 흰자에서 더 많은 양의 리소자임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이 효소는 무해한 박테리아의 소량에 대해서만 효과적이었고, 따라서 치료 잠재력이 거의 없었다. 이것은 병원성 박테리아와 무해한 박테리아의 주요 차이점 중 하나를 나타낸다.[9]

원 논문에서 설명된 "급성 코감기를 앓고 있는 환자"[13]는 플레밍 자신으로 밝혀졌다. 1921년 11월 21일자 그의 연구 노트에는 작은 메모와 함께 배양 접시의 스케치가 있다. "A.F.의 코에서 나온 포도상구균."[25] 그는 또한 비강 점액에 존재하는 박테리아를 ''Micrococcus Lysodeikticus''로 확인했는데, 이는 리소자임 활성에 대한 감수성을 의미하는 종명이다.[15] 이 종은 1972년 ''Micrococcus luteus''로 재분류되었다.[16] 이 박테리아의 "플레밍 균주"(NCTC2665)는 다양한 생물학적 연구의 모델이 되었다.[17][18]

리소자임의 중요성은 인식되지 않았고, 플레밍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32년 10월 18일 왕립의학회 회의에서 회장 연설에서 "저는 두 가지 이유로 이 연설의 주제로 리소자임을 선택했습니다. 첫째, 저는 그 이름에 대한 부성적인 관심이 있고, 둘째, 자연 면역과 관련된 그 중요성이 일반적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19]

그는 1945년 12월 11일 노벨 강연에서 리소자임을 간략하게 언급하며 "페니실린은 제가 발견한 최초의 항생 물질이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했다.[20] 20세기 말이 되어서야 면역학에서 플레밍의 발견의 진정한 중요성이 인식되었는데, 리소자임이 우리의 선천 면역의 일부를 구성하는 최초로 발견된 항균 단백질이 되었기 때문이다.[21][22]

=== 작용 기작 ===

리소자임펩티도글리칸이라는 점액다당류를 가수분해한다. 펩티도글리칸은 n-아세틸뮤라믹산과 n-아세틸글루코사민으로 이루어진다. 이 다당류 사이의 beta-1, 4-뮤라미드 결합을 분해함으로 박테리아의 세포벽을 용해한다.

== 페니실린 ==

페니실린은 페니실륨 곰팡이에서 추출한 세계 최초의 항생제이다.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이 우연히 발견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하워드 플로리와 에른스트 체인에 의해 대량 생산되어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 정의 ===

페니실린이란 페니실륨 곰팡이류에서 얻어낸 화합물로써 항생제의 한 종류이다. 페니실린은 발견된 당시 매독, 포도상구균 감염 등 많은 병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작용하였다. 비록 현재 많은 박테리아들이 페니실린에 대해서 저항성이 있지만 여전히 많이 쓰이고 있다. 모든 페니실린은 베타-락탐 항생제이고 박테리아의 감염을 막는데 쓰인다.

=== 발견 배경 ===

페니실린의 발견은 루이 파스퇴르가 없이는 시작될 수 없다. 파스퇴르는 항생제뿐만 아니라 플레밍의 주 연구분야이던 방부학, 방부 외과학, 세균학, 면역학 등의 시작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전염병학, 공중 보건, 면역 계획 등 다양한 현대 의학을 시작하였다. 감염과 전염병의 원인이 세균임을 증명한 것이 파스퇴르였다. 그의 발견은 단순한 발견이 아닌, 이후 과학사에서 눈에 보이는 세계뿐만 아니라 미시 세계에 대한 연구를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그러한 생각은 후에 공기 중의 세균들을 죽임으로써 상처 부위의 감염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리스터의 멸균 외과술을 포함한 외과술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 일으켰으며, 세균에 대한 파스퇴르의 연구는 사실상 1870년부터 1940년까지의 세균학 및 의학의 흐름을 결정지었다. 이때부터 감염성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혈청 속의 백신을 사용하는 면역학이 사용되게 되었다.

파스퇴르와 페니실린의 역사적인 연결은 앰로스 라이트의 장티푸스 백신의 개발이었다. 파스퇴르는 실질적으로도 페니실린을 구현한 플레밍, 플로리, 체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플레밍과 플로리는 그를 자주 인용하였으며, 체인은 파스퇴르를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추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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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견 과정 및 페니실린 신화 ===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연구 중 우연히 오래된 포도상구균 배양 배지에서 곰팡이 군체를 발견하고, 이 곰팡이가 주변 세균의 성장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113][114][115] 하지만 당시 플레밍의 발표는 과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워드 플로리와 에른스트 체인이 페니실린을 치료약으로 대량 생산하기 전까지, 플레밍의 논문을 제외하고는 페니실린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페니실린 관련 기사와 책이 많아졌고, 플레밍의 발견 이야기는 거의 20년이 지나서야 처음 출판되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플레밍과 페니실린 발견에 대한 신화 같은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일반적인 페니실린 발견 신화는 플레밍의 실험실이 지저분했고, 그가 여름 휴가를 떠나면서 포도상구균 배양기를 둔 채 떠났고, 돌아와서 열린 배양 접시에서 푸른색 곰팡이와 그 주변의 죽은 포도상구균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는 곰팡이 추출물에 페니실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리치 캘더의 『생명의 구원자들』에는 창문으로부터 곰팡이가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추가되었지만, 캘더는 플레밍이 실제로 사용 가능한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루도비치는 『플레밍, 페니실린의 발견자』에서 곰팡이 포자가 우연히 플레밍의 배지에 떨어졌고, 플레밍은 이를 발견할 자질이 충분한 천재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로날드 헤어 교수는 플레밍이 곰팡이 접시에서 본 것을 잘못 해석했다고 밝혔다. 헤어 교수는 플레밍의 관찰에 대한 추적 실험 결과를 1968년에 발표하였다.[116] 체인 교수는 개막 연설에서 창문으로 들어온 곰팡이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며, 플레밍의 발견은 극히 희귀한 상황이 겹쳐야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플레밍이 실제로 발견한 것은 페니실린 자체가 아니라, 페니실린의 영향으로 특별한 경우에만 생길 수 있는 포도상구균의 자기 분해 작용이었다. 체인 교수는 플레밍이 포도상구균을 비이상적으로 오래 방치했고, 세균 성장 억제 효과가 아닌 세균 분해 현상을 발견한 것이라고 말했다.

1949년, 플로리와 체인을 포함한 옥스퍼드 팀은 플레밍의 업적을 "행운에 의해 페니실륨 노타툼이 실험 접시에 떨어져서 생긴 변화를 인지하고 그것을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후에 다른 사람들이 사용 가능하도록 곰팡이를 보관해 두었다는 것 정도이다."라고 평가하였다.

1927년까지 플레밍은 포도상구균(staphylococci)의 특성을 연구하고 있었다. 1928년, 그는 조셉 워릭 비거(Joseph Warwick Bigger)의 연구 이후 자연 상태에서 배양된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의 변이를 연구했다.[24] 1928년 9월 3일, 플레밍은 휴가를 마치고 실험실로 돌아왔다.[25] 휴가를 떠나기 전, 그는 배양 접시에 포도상구균을 접종하고 실험실 구석의 벤치 위에 두었다.[25] 돌아온 플레밍은 한 배양 접시가 곰팡이에 오염되었고, 곰팡이 바로 주변의 포도상구균 집락이 파괴된 것을 발견하고, "재밌네(That's funny)"라고 말했다.[26] 플레밍은 오염된 배양 접시를 그의 전 조수인 머린 프라이스(Merlin Pryce)에게 보여주었고, 프라이스는 그에게 "그렇게 해서 리소자임을 발견했잖아요(That's how you discovered lysozyme)"라고 상기시켰다.[27] 그는 그 곰팡이가 페니실리움(Penicillium) 속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P. chrysogenum이라고 추측했지만, 나중에는 P. rubens로 결정되었다.[28][29]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하고 실험한 실험실은 세인트 메리 병원(St. Mary's Hospital), 패딩턴(Paddington)에 알렉산더 플레밍 연구소 박물관(Alexander Fleming Laboratory Museum)으로 보존되어 있다. 곰팡이 오염원은 1966년 플레밍의 방 바로 아래에 있던 방에서 나온 것으로 밝혀졌다.[30][31]

플레밍은 순수 배양에서 곰팡이를 배양하여 배양액에 항균 물질이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많은 유기체에 대한 항균 효과를 조사했고, 그것은 포도상구균과 다른 많은 그람양성균(Gram-positive) 병원균에 영향을 미치지만, 그람음성균(Gram-negative)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몇 달 동안 "곰팡이 주스(mould juice)"라고 부른 후, 그는 1929년 3월 7일 항균 물질에 페니실린(penicilli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56]

플레밍은 1929년 2월 13일 의학연구클럽 앞에서 자신의 발견을 발표했지만,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25] 플레밍은 1929년 ''영국 실험병리학 저널''에 자신의 발견을 발표했지만,[32] 논문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대량 생산과 화합물 분리의 어려움으로 인해 1930년대에 페니실린은 거의 잊혀졌다.[47]

1936년까지도 페니실린에 대한 인식은 전무했다. 플레밍이 런던에서 열린 제2차 국제 미생물학회에서 페니실린의 의학적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33][34] 앨리슨은 "플레밍은 크게 실망했지만...그의 견해를 바꾸거나 페니실린 연구를 계속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습니다."라고 언급했다.[12] 1941년, ''영국 의학 저널''은 "[페니실린은] 다른 어떤 관점에서도 유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지 않았습니다."라고 보도했다.[35][36][30]

1942년, 순수 화합물로 생산된 페니실린은 여전히 부족하여 임상 사용이 불가능했다. 플레밍이 옥스퍼드 팀이 준비한 최초의 샘플 몇 개를 사용하여 연쇄상구균 수막염 환자를 치료했을 때, 성공적인 치료는 ''타임스''지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하지만 플레밍과 옥스퍼드 팀이 언급되지 않았고, 옥스퍼드가 약물의 원천으로 지목되었다. 라이트는 ''타임스''지 편집자에게 편지를 썼고, ''타임스''지는 플레밍을 인터뷰했지만, 플로리는 옥스퍼드 팀이 언론 보도를 추구하는 것을 금지했다. 결과적으로 플레밍만이 언론에 널리 알려졌는데,[93] 이는 그가 약물 발견과 개발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오해로 이어졌다.[94] 플레밍 자신은 이 사건을 "플레밍 신화"라고 언급했다.[95][96]

=== 작용 기작 ===

페니실린베타-락탐 항생제의 한 종류이다. 베타-락탐 항생제는 항생제의 한 부류로, 박테리아 세포벽 합성을 방해하여 항균 작용을 한다. 베타-락탐 고리는 항균 작용에 필수적이며, 주위의 겉사슬은 항균 범위, 산에 대한 안정성, 흡수율 등 부가적인 성질을 결정한다.

=== E. B. 체인, H. W. 플로리의 페니실린 분리·정제, 대량 생산 ===

벤질페니실린의 3D 모델


1939년에 플레밍의 세균 균주 표본은 하워드 플로리가 이끄는 옥스퍼드 대학교 연구팀으로 넘어갔다.[117][118] 이 연구팀에는 기술적으로 재능이 뛰어난 에른스트 체인이 함께 있었다. 오랜 노력 끝에 이 연구팀은 록펠러 재단으로부터의 후원으로 세균 균주를 죽이는 물질을 확인하고 추출해내고자 하였다. 게르하르트 도마크가 1935년에 보인 프론토실의 주사가 연쇄구균에 의한 감염을 치료한 것은 그들의 연구에 영감을 주었으며, 이 사건은 침입하는 세균이 약으로부터 치료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플로리와 체인을 포함한 그의 연구팀은 빠르게 정제된 페니실린을 실험에 충분한 양만큼 추출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1년 안에 란셋지에 발표를 할 수 있었다. 페니실린의 주사는 다양한 감염 증세를 가진 환자에 대해 매우 높은 항생능력을 보였다. 옥스퍼드 팀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페니실린 수요에 맞추었다. 그들은 정부가 페니실린 생산에 필요한 체계를 형성하는 것을 도왔으며, 플로리는 1940년대에 미국의 제약회사들이 대량으로 페니실린을 생산하도록 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에 페니실린은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하였다.

옥스퍼드에서 어니스트 체인과 에드워드 아브라함은 항생제의 분자 구조를 연구하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페니실린의 정확한 구조를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이었다.[37][38] 1940년 연구팀이 첫 번째 연구 결과를 발표한 직후, 플레밍은 체인의 부서장인 하워드 플로리에게 며칠 안에 방문하겠다고 전화했다. 체인은 플레밍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맙소사!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라고 말했다.[39]

노먼 히틀리는 페니실린의 활성 성분의 산도를 바꿔 물로 다시 옮기는 방법을 제안했다. 이를 통해 동물 실험을 시작할 만큼 충분한 약물을 생산할 수 있었다. 옥스퍼드 연구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고, 한때 윌리엄 던 병리학교 전체가 페니실린 생산에 참여했다. 1940년 연구팀이 효과적인 최초의 안정적인 형태로 페니실린을 정제하는 방법을 개발한 후, 여러 임상 시험이 이어졌고, 그 놀라운 성공은 연구팀이 1945년 대량 생산 및 대량 유통 방법을 개발하도록 고무시켰다.[40][41]

플레밍은 페니실린 개발에 대한 자신의 역할에 대해 겸손했으며, 자신의 명성을 "플레밍 신화"라고 묘사하고 실험실에서의 호기심을 실용적인 약물로 변모시킨 플로리와 체인을 칭찬했다. 플레밍은 활성 물질의 특성을 처음으로 발견하여 페니실린이라는 이름을 짓는 특권을 얻었다. 그는 또한 12년 동안 원래 곰팡이를 보관하고 배양하며 배포했고, 1940년까지 페니실린을 만들 만큼 충분한 기술을 가진 화학자의 도움을 얻으려고 계속 노력했다. 헨리 해리스 경은 1998년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플레밍이 없었다면 체인도 없었을 것이고, 체인이 없었다면 플로리도 없었을 것이며, 플로리가 없었다면 히틀리도 없었을 것이고, 히틀리가 없었다면 페니실린도 없었을 것이다."[42] 페니실린의 발견과 그 이후의 처방약으로서의 개발은 현대 항생제의 시작을 알린다.[43]

1942년 중반까지 옥스퍼드 팀은 노란색 분말 형태의 순수한 페니실린 화합물을 생산했다.[65] 1943년 4월 5일 페니실린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위원회는 위원장으로 위어 경, 플레밍, 플로리, 퍼시벌 하틀리 경, 앨리슨, 제약 회사 대표를 포함했다. 주요 목표는 미국 회사와의 협력을 통해 페니실린을 신속하게 대량 생산하고, 약물을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군에게만 공급하는 것이었다.[12] 1944년 D-데이까지 연합군 부상자를 모두 치료할 만큼 충분한 페니실린이 생산되었다.[70]

=== 오늘날 페니실린의 활용 및 항생제 분야에 대한 영향 ===

페니실린은 최초의 항생제일 뿐만 아니라, 많은 개량을 거쳐 오늘날에도 환자 치료에 유용하게 쓰이는 항생제이다. 투여 방법 개선, 내성 균주 대응, 작용 범위 확대를 위해 개량된 항생제를 페니실린계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페니실린계 항생제로는 페녹시메틸 페니실린, 벤질페니실린, 프로카인 벤진페니실린 등이 있다.

오늘날에는 페니실린 외에도 다양한 항생제가 존재한다. 페니실린은 베타-락탐계 항생제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베타-락탐계 항생제는 세균 세포막의 펩티도글리칸 교차연결 배열을 망가뜨려 세균을 죽인다. 이와 유사하게 세포벽을 파괴하는 항생제로는 세펨 계열 항생제가 있다. 또한, 세균 증식을 억제하는 마크로라이드 계열, 단백질 합성을 억제하는 테트라시클린 계열, 효소 생성을 방해하는 퀴놀론 계열 등 다양한 종류의 항생제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분류:페니실린 참조)

페니실린은 본래 자연계에 존재하는 항생 물질이었다. 초기에는 자연에서 발견된 물질을 주로 이용했지만, 화학 기술 발전으로 인공 합성이 가능해졌다. 구조를 일부 변형한 반합성, 완전히 새로운 항생 물질 합성 등을 통해 항생제의 종류와 폭이 크게 넓어졌다. 그러나 항생제 발전과 더불어 체내 부작용과 내성균 문제도 심각해지고 있다. 따라서 항생제 남용을 막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플레밍의 발견과 유사한 방법으로 현대 항생제가 시험됩니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너무 적게 사용하거나 사용 기간이 짧으면 세균이 항생제 내성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일찍이 발견했다. 알름로스 라이트(Almroth Wright)는 실험 관찰 이전에 이미 항생제 내성을 예측하기도 했다. 플레밍은 여러 강연에서 페니실린 사용에 대한 주의를 당부했다. 1945년 6월 26일, 그는 "미생물은 페니실린에 대한 저항력을 키우도록 교육받고 있으며, 페니실린에 내성이 있는 많은 유기체가 배양됩니다… 이러한 경우, 페니실린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결국 페니실린 내성 유기체 감염으로 사망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도덕적으로 책임이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악이 막아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71]라고 경고했다. 그는 적절한 진단 없이 페니실린을 사용하지 말고, 사용 시에는 너무 적은 양이나 짧은 기간 동안 사용하지 않도록 경고했다. 이러한 조건이 박테리아의 항생제 내성을 유발하기 때문이다.[72]

1942년, ''황색포도상구균(S. aureus)''이 장기간 노출될 경우 페니실린 내성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 실험적으로 증명되었다.[73] 플레밍은 노벨 강연에서 임상 조건에서 페니실린 내성 가능성을 설명하며, "페니실린을 누구나 상점에서 살 수 있는 시대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지한 사람이 자신에게 쉽게 과소 투여하여 미생물을 치사량이 아닌 약물에 노출시켜 내성을 갖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20]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최초의 페니실린 내성 임상 사례가 보고되었다.[74]

3. 1. 1920년대 이전의 연구 및 살바르산 사용

플레밍은 세인트 메리 병원에서 앰로스 라이트 밑에서 공부할 때, 라이트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 초기 연구들을 수행했다[108]. 당시 혈액의 면역 기작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되었다. 하나는 혈액 중 백신 작용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혈구와 같은 혈액 요소들이 식세포작용을 통해 면역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라이트는 이 두 이론을 조화시켜 현대의 면역 메커니즘에 가깝게 만들었다. 그는 혈액 중 항원과 결합하여 대식 세포 또는 과립 백혈구에 의한 식세포 작용을 촉진하는 혈청 속 물질을 옵소닌이라 명명했다. 플레밍의 초기 연구는 주로 옵소닌 계수 측정 방법을 확립하고 이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연구에는 유리 기구와 현미경을 이용한 미세 기술이 필요했는데, 플레밍은 이 기술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는 그에게 중요한 기회를 제공했다.

플레밍은 영국에서 살바르산을 사용한 최초의 의사이다[109]. 라이트의 친구인 파울 에이리히는 생체 내 미생물을 죽일 수 있는 최초의 화합물인 살바르산을 합성했다. 살바르산은 최초의 화학요법제로, 에이리히가 1909년 매독에 걸린 토끼에게 투여했을 때 치료 효과를 보였다. 1910년 에이리히는 런던을 방문하여 라이트에게 살바르산을 주었다. 살바르산은 다루기 까다로워 미세 기술에 뛰어난 플레밍이 다루게 되었다. 살바르산은 가루 형태로, 투여 전 물에 녹여 정맥 주사해야 했으며, 주변 조직으로 퍼지면 팔 전체를 못 쓰게 될 수도 있었다.

플레밍은 영국에서 살바르산을 사용한 최초의 의사가 되었으며, 이는 화학요법에 대해 부정적이던 세인트 메리 병원 예방접종과에서 가장 먼저 효과적인 화학요법제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다.

3. 2. 소독약 및 방부외과기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플레밍은 전쟁 부상자들의 썩어 들어가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볼로냐카지노에 설치된 특별 연구실에서 라이트와 함께 연구했다.[110] 당시 패혈증, 회저, 파상풍 등은 상처가 오염되기 쉬운 부상자들에게 흔한 질병이었다. 루이 파스퇴르 이후 발전된 세균학면역학의 발전으로 방부외과기술 또한 발전하였다. 리스터는 모든 수술 기구를 소독하고 석탄산과 같은 강력한 소독약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는 보편적인 지식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플레밍은 감염된 상처에 소독약을 사용하면 소독약이 미생물보다 자연 방어 체계에 더 큰 손상을 주어 상황을 악화시킨다는 것을 증명하였다.[111] 플레밍은 감염된 상처에서 식세포가 증가하며, 소독약은 감염 미생물보다 백혈구를 먼저 죽인다는 것을 증명하였다.[111] 라이터 경과 함께 소독약으로 상처 조직 감염을 막는 실험을 계속했지만, 미생물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었고, 상처로 죽어가는 조직을 최대한 잘라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는 실용적이지 못해 군의료 당국과의 잦은 논쟁을 유발했다. 플레밍은 이러한 경험으로 화학요법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갖게 되었다.

플레밍은 레너드 콜브룩(Leonard Colebrook) 경과 알므로스 라이트(Sir Almroth Wright) 경과 함께 세인트 메리 병원의 예방접종 부서 전체를 프랑스 불로뉴쉬르메르(Boulogne-sur-Mer)에 있는 영국 군 병원으로 옮겼다.[9] 영국 육군 의무 군단의 임시 중위로 복무하면서, 그는 감염된 상처로 인한 패혈증으로 사망하는 많은 군인들을 목격했다. 당시 감염된 상처 치료에 사용되었던 소독제(Antiseptics)는 종종 부상을 악화시켰다.[9] 1917년 의학 저널인 《랜싯》(The Lancet)에 발표된 논문에서 그는 소독제가 감염 자체보다 더 많은 군인을 사망에 이르게 한 이유를 설명했다. 소독제는 표면에서는 효과가 좋았지만, 깊은 상처는 소독제로부터 혐기성 세균을 보호했고, 소독제는 환자를 보호하는 유익한 물질을 제거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세균을 제거하는 데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10] 라이트 경은 플레밍의 연구 결과를 지지했지만, 대부분의 군 의사들은 환자의 상태를 악화시키는 경우에도 소독제를 계속 사용했다.[11] 이후 개발된 많은 소독약들이 시험관 내에서는 효과가 있었지만, 생체 내에서는 효과가 없음이 증명되었다.

3. 3. 리소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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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플레밍은 라는 논문에서 리소자임이라는 항생 물질을 발표했다.[13] 플레밍은 리소자임 발견 이전에는 미생물이 동물의 체내에 들어올 경우, 결코 공격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리소자임은 콧물 속에서 처음 발견되었는데, 사람과 동물에서 분비되는 점액 속에 포함되어 있는 효소로 체내의 자연 방어 체계 중 하나이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발견한 후에도 여전히 리소자임이 페니실린보다 더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20]

모루아가 쓴 플레밍의 전기에서 플레밍의 조수의 말을 인용한 바에 따르면,[112] 플레밍은 감기에 걸렸을 때의 콧물을 노란색 군체의 미생물에 첨가하였다. 그는 몇 개의 배양접시를 씻던 도중 노란색 군체의 미생물의 한쪽에 미생물이 없는 부분을 발견하였고, 그 안의 미생물은 반투명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분해 중인 미생물이 보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플레밍은 자신이 첨가한 점액 속에 주위에 있는 미생물을 분해시킬 수 있는 물질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였다.

리소자임의 발견에서 플레밍에게 실망스러웠던 점은 외부에서 공급된 미생물인 마이크로코쿠스 리소데익티쿠스가 독성이 없는 세균이라는 점이었다. 즉, 리소자임은 독성이 없는 세균에는 효과가 있지만 독성 세균에는 그 효과가 거의 없다. 플레밍은 이후에 리소자임이 무엇인지 규명하고, 그 기작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리소자임 발견 경험은 6년 후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리소자임 자체의 낮은 항생 능력은 플레밍이 화학요법에 대해 좁은 시각을 갖도록 하기도 하여서 페니실린 발견 이후에 페니실린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한 부분도 있다.

플레밍은 리소자임의 발견과 함께 인간의 혈액과 다른 체액의 민감성 적정 실험과 정량 방법을 고안하여 나중에 페니실린의 적정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당시 그의 연구 조교였던 V. D. 앨리슨의 회상에 따르면, 플레밍은 깔끔한 연구자는 아니었고, 배양 접시에서 보통 예상치 못한 박테리아 성장을 기대했다고 한다. 플레밍은 앨리슨을 "실험실에서의 지나친 깔끔함" 때문에 놀렸고, 앨리슨은 그러한 깔끔하지 못함이 플레밍의 실험 성공의 요인이라고 생각하며, "[만약] 그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깔끔했더라면, 그는 그의 두 가지 위대한 발견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12]

1921년 후반, 플레밍이 박테리아를 위한 한천 배지를 관리하던 중, 한 접시가 공기 중 박테리아에 오염된 것을 발견했다. 그는 비강 점액을 첨가했고, 점액이 박테리아 성장을 억제한다는 것을 알았다.[13] 점액 주변에는 투명한 원형(점액으로부터 1cm)이 있었는데, 이는 박테리아의 사멸대를 나타내고, 그 너머에는 유리처럼 반투명한 고리와 그 너머로 정상적인 박테리아 성장을 나타내는 불투명한 영역이 있었다. 신선한 점액을 첨가한 지 2분 이내에 노란색 식염수는 완전히 투명해졌다. 그는 동료들이 제공한 눈물을 사용하여 실험을 확장했다. 앨리슨은 "다음 5~6주 동안, 우리의 눈물은 이 놀라운 현상의 공급원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기 위해 (양파 실패 후) 우리가 사용한 레몬이 많았습니다... 우리의 눈물에 대한 수요가 너무 커서, 실험실 보조원들이 징집되어, 기여할 때마다 3펜스를 받았습니다."라고 회상했다.[12]

타액, 연골, 혈액, 정액, 난소낭종액, 고름, 달걀 흰자를 사용한 그의 추가 실험은 살균제가 이 모든 것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25] 그는 1921년 12월 의학 연구 클럽 앞에서, 그리고 다음 해 왕립 학회 앞에서 그의 발견을 보고했지만, 앨리슨이 회상했듯이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했다. 앨리슨은 "저는 플레밍의 손님으로 이 [의학 연구 클럽]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그의 발견을 설명하는 논문은 질문도 토론도 없이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며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졌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음 해에 그는 피카딜리 버링턴 하우스 왕립 학회 앞에서 이 주제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고, 그와 저는 우리의 연구를 시연했습니다. 한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논평이나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라고 회상했다.[12]

1922년 5월 1일자 ''왕립학회 철학회보 B: 생물과학''에 "조직과 분비물에서 발견된 놀라운 용균 요소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보고하면서 플레밍은 "이 논문에서 저는 신체의 조직과 분비물에 존재하는 특정 박테리아를 빠르게 용해할 수 있는 물질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 물질은 효소와 유사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는 이것을 "리소자임"이라고 불렀고, 이 논문 전체에서 이 이름으로 언급하겠습니다. 리소자임은 급성 코감기를 앓고 있는 환자에 대한 일부 연구 중에 처음 발견되었습니다."라고 썼다.[13]

플레밍은 앨리슨과 함께 같은 해 1922년 10월 ''영국 실험 병리학 저널''에 리소자임에 대한 추가 연구를 발표했다.[14] 계란 흰자에서 더 많은 양의 리소자임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이 효소는 무해한 박테리아의 소량에 대해서만 효과적이었고, 따라서 치료 잠재력이 거의 없었다. 이것은 병원성 박테리아와 무해한 박테리아의 주요 차이점 중 하나를 나타낸다.[9]

원 논문에서 설명된 "급성 코감기를 앓고 있는 환자"[13]는 플레밍 자신으로 밝혀졌다. 1921년 11월 21일자 그의 연구 노트에는 작은 메모와 함께 배양 접시의 스케치가 있다. "A.F.의 코에서 나온 포도상구균."[25] 그는 또한 비강 점액에 존재하는 박테리아를 ''Micrococcus Lysodeikticus''로 확인했는데, 이는 리소자임 활성에 대한 감수성을 의미하는 종명이다.[15] 이 종은 1972년 ''Micrococcus luteus''로 재분류되었다.[16] 이 박테리아의 "플레밍 균주"(NCTC2665)는 다양한 생물학적 연구의 모델이 되었다.[17][18]

리소자임의 중요성은 인식되지 않았고, 플레밍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32년 10월 18일 왕립의학회 회의에서 회장 연설에서 "저는 두 가지 이유로 이 연설의 주제로 리소자임을 선택했습니다. 첫째, 저는 그 이름에 대한 부성적인 관심이 있고, 둘째, 자연 면역과 관련된 그 중요성이 일반적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19]

그는 1945년 12월 11일 노벨 강연에서 리소자임을 간략하게 언급하며 "페니실린은 제가 발견한 최초의 항생 물질이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했다.[20] 20세기 말이 되어서야 면역학에서 플레밍의 발견의 진정한 중요성이 인식되었는데, 리소자임이 우리의 선천 면역의 일부를 구성하는 최초로 발견된 항균 단백질이 되었기 때문이다.[21][22]

3. 3. 1. 정의

리소자임세포벽에 있는 펩티도글리칸가수분해하는 항균 효소이며 동물의 조직, 침, 눈물, 알의 흰자 따위에 들어있다.

3. 3. 2. 발견 과정

1921년 플레밍은 라는 논문에서 리소자임이라는 항생 물질을 발표했다.[13] 플레밍은 리소자임 발견 이전에는 미생물이 동물의 체내에 들어올 경우, 결코 공격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리소자임은 콧물 속에서 처음 발견되었는데, 사람과 동물에서 분비되는 점액 속에 포함되어 있는 효소로 체내의 자연 방어 체계 중 하나이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발견한 후에도 여전히 리소자임이 페니실린보다 더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20]

모루아가 쓴 플레밍의 전기에서 플레밍의 조수의 말을 인용한 바에 따르면,[112] 플레밍은 감기에 걸렸을 때의 콧물을 노란색 군체의 미생물에 첨가하였다. 그는 몇 개의 배양접시를 씻던 도중 노란색 군체의 미생물의 한쪽에 미생물이 없는 부분을 발견하였고, 그 안의 미생물은 반투명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분해 중인 미생물이 보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플레밍은 자신이 첨가한 점액 속에 주위에 있는 미생물을 분해시킬 수 있는 물질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였다.

리소자임의 발견에서 플레밍에게 실망스러웠던 점은 외부에서 공급된 미생물인 마이크로코쿠스 리소데익티쿠스가 독성이 없는 세균이라는 점이었다. 즉, 리소자임은 독성이 없는 세균에는 효과가 있지만 독성 세균에는 그 효과가 거의 없다. 플레밍은 이후에 리소자임이 무엇인지 규명하고, 그 기작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리소자임 발견 경험은 6년 후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리소자임 자체의 낮은 항생 능력은 플레밍이 화학요법에 대해 좁은 시각을 갖도록 하기도 하여서 페니실린 발견 이후에 페니실린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한 부분도 있다.

플레밍은 리소자임의 발견과 함께 인간의 혈액과 다른 체액의 민감성 적정 실험과 정량 방법을 고안하여 나중에 페니실린의 적정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당시 그의 연구 조교였던 V. D. 앨리슨의 회상에 따르면, 플레밍은 깔끔한 연구자는 아니었고, 배양 접시에서 보통 예상치 못한 박테리아 성장을 기대했다고 한다. 플레밍은 앨리슨을 "실험실에서의 지나친 깔끔함" 때문에 놀렸고, 앨리슨은 그러한 깔끔하지 못함이 플레밍의 실험 성공의 요인이라고 생각하며, "[만약] 그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깔끔했더라면, 그는 그의 두 가지 위대한 발견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12]

1921년 후반, 플레밍이 박테리아를 위한 한천 배지를 관리하던 중, 한 접시가 공기 중 박테리아에 오염된 것을 발견했다. 그는 비강 점액을 첨가했고, 점액이 박테리아 성장을 억제한다는 것을 알았다.[13] 점액 주변에는 투명한 원형(점액으로부터 1cm)이 있었는데, 이는 박테리아의 사멸대를 나타내고, 그 너머에는 유리처럼 반투명한 고리와 그 너머로 정상적인 박테리아 성장을 나타내는 불투명한 영역이 있었다. 신선한 점액을 첨가한 지 2분 이내에 노란색 식염수는 완전히 투명해졌다. 그는 동료들이 제공한 눈물을 사용하여 실험을 확장했다. 앨리슨은 "다음 5~6주 동안, 우리의 눈물은 이 놀라운 현상의 공급원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기 위해 (양파 실패 후) 우리가 사용한 레몬이 많았습니다... 우리의 눈물에 대한 수요가 너무 커서, 실험실 보조원들이 징집되어, 기여할 때마다 3펜스를 받았습니다."라고 회상했다.[12]

타액, 연골, 혈액, 정액, 난소낭종액, 고름, 달걀 흰자를 사용한 그의 추가 실험은 살균제가 이 모든 것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25] 그는 12월 의학 연구 클럽 앞에서, 그리고 다음 해 왕립 학회 앞에서 그의 발견을 보고했지만, 앨리슨이 회상했듯이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했다. 앨리슨은 "저는 플레밍의 손님으로 이 [의학 연구 클럽]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그의 발견을 설명하는 논문은 질문도 토론도 없이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며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졌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음 해에 그는 피카딜리 버링턴 하우스 왕립 학회 앞에서 이 주제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고, 그와 저는 우리의 연구를 시연했습니다. 한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논평이나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라고 회상했다.[12]

1922년 5월 1일자 ''왕립학회 철학회보 B: 생물과학''에 "조직과 분비물에서 발견된 놀라운 용균 요소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보고하면서 플레밍은 "이 논문에서 저는 신체의 조직과 분비물에 존재하는 특정 박테리아를 빠르게 용해할 수 있는 물질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 물질은 효소와 유사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는 이것을 "리소자임"이라고 불렀고, 이 논문 전체에서 이 이름으로 언급하겠습니다. 리소자임은 급성 코감기를 앓고 있는 환자에 대한 일부 연구 중에 처음 발견되었습니다."라고 썼다.[13]

플레밍은 앨리슨과 함께 같은 해 10월 ''영국 실험 병리학 저널''에 리소자임에 대한 추가 연구를 발표했다.[14] 계란 흰자에서 더 많은 양의 리소자임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이 효소는 무해한 박테리아의 소량에 대해서만 효과적이었고, 따라서 치료 잠재력이 거의 없었다. 이것은 병원성 박테리아와 무해한 박테리아의 주요 차이점 중 하나를 나타낸다.[9]

원 논문에서 설명된 "급성 코감기를 앓고 있는 환자"[13]는 플레밍 자신으로 밝혀졌다. 1921년 11월 21일자 그의 연구 노트에는 작은 메모와 함께 배양 접시의 스케치가 있다. "A.F.의 코에서 나온 포도상구균."[25] 그는 또한 비강 점액에 존재하는 박테리아를 ''Micrococcus Lysodeikticus''로 확인했는데, 이는 리소자임 활성에 대한 감수성을 의미하는 종명이다.[15] 이 종은 1972년 ''Micrococcus luteus''로 재분류되었다.[16] 이 박테리아의 "플레밍 균주"(NCTC2665)는 다양한 생물학적 연구의 모델이 되었다.[17][18]

리소자임의 중요성은 인식되지 않았고, 플레밍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32년 10월 18일 왕립의학회 회의에서 회장 연설에서 "저는 두 가지 이유로 이 연설의 주제로 리소자임을 선택했습니다. 첫째, 저는 그 이름에 대한 부성적인 관심이 있고, 둘째, 자연 면역과 관련된 그 중요성이 일반적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19]

그는 1945년 12월 11일 노벨 강연에서 리소자임을 간략하게 언급하며 "페니실린은 제가 발견한 최초의 항생 물질이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했다.[20] 20세기 말이 되어서야 면역학에서 플레밍의 발견의 진정한 중요성이 인식되었는데, 리소자임이 우리의 선천 면역의 일부를 구성하는 최초로 발견된 항균 단백질이 되었기 때문이다.[21][22]

3. 3. 3. 작용 기작

리소자임펩티도글리칸이라는 점액다당류를 가수분해한다. 펩티도글리칸은 n-아세틸뮤라믹산과 n-아세틸글루코사민으로 이루어진다. 이 다당류 사이의 beta-1, 4-뮤라미드 결합을 분해함으로 박테리아의 세포벽을 용해한다.

3. 4. 페니실린

페니실린은 페니실륨 곰팡이에서 추출한 세계 최초의 항생제이다.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이 우연히 발견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하워드 플로리와 에른스트 체인에 의해 대량 생산되어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플레밍은 스코틀랜드 에어셔 지역 로크필드 농장에서 태어나 킬마녹의 리전트 공예학교에서 2년간 교육받았다. 런던으로 이주한 그는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의 왕립 과학 기술 학원에 입학했다. 졸업 후 상선 회사에 4년간 근무한 후, 1903년 런던 대학교 세인트 메리 병원 의학교(현재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에 입학하여 1906년 졸업 후 세인트 메리 병원 접종부에서 A. E. 라이트의 조수로 일했다. 이 해에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제1차 세계 대전 중 병원이 파괴될 때까지 같은 의학교에 소속되어 있었다.

플레밍은 항균성을 가진 리소자임과 페니실린이라는 두 가지 물질을 모두 1920년대에 발견했는데, 이 두 가지는 모두 우연한 발견이었다. 리소자임은 1921년에 발견되었는데, 동물의 침이나 난백에 포함되어 있는 살균 작용을 하는 효소로, 플레밍이 페트리 접시에 세균을 도말한 후 재채기를 함으로써 발견되었다. 며칠 후, 재채기의 점액이 떨어진 장소의 세균 콜로니가 파괴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 그의 실험 노트에 기록되어 있다.

1928년, 플레밍은 실험실에 흩어져 있던 임시 실험 결과들을 정리하던 중 황색포도상구균이 가득한 배지에 오염된 곰팡이 콜로니를 발견했다. 페트리 접시 위의 세균 콜로니가 곰팡이 주변만 투명하고 세균의 생육이 저지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푸른곰팡이를 액체 배지에서 배양하고, 그 배양액을 여과한 여액에 이 항균 물질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푸른곰팡이의 속명인 ''Penicillium''에 따라 "페니실린"이라고 명명했다. 플레밍은 1929년 6월 ''British Journal of Experimental Pathology''지에 페니실린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실용화하기 위한 기초 연구를 계속했지만, 페니실린 정제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1940년, 하워드 플로리와 에른스트 보리스 체인이 페니실린 정제 및 대량 생산에 성공했다. 이들의 연구 덕분에 제2차 세계 대전 중 페니실린이 의약품으로 대량 생산되어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플레밍은 1944년 페니실린 발견의 공적으로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1945년에는 플로리, 체인과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1946년에는 왕립 예술 협회로부터 앨버트 메달을 수상했다.

플레밍의 페니실린 발견은 현대 의약에 혁명을 일으켜 효과적인 항생 물질의 시대를 열었다.

3. 4. 1. 정의

페니실린이란 페니실륨 곰팡이류에서 얻어낸 화합물로써 항생제의 한 종류이다. 페니실린은 발견된 당시 매독, 포도상구균 감염 등 많은 병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작용하였다. 비록 현재 많은 박테리아들이 페니실린에 대해서 저항성이 있지만 여전히 많이 쓰이고 있다. 모든 페니실린은 베타-락탐 항생제이고 박테리아의 감염을 막는데 쓰인다.

3. 4. 2. 발견 배경

페니실린의 발견은 루이 파스퇴르가 없이는 시작될 수 없다. 파스퇴르는 항생제뿐만 아니라 플레밍의 주 연구분야이던 방부학, 방부 외과학, 세균학, 면역학 등의 시작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전염병학, 공중 보건, 면역 계획 등 다양한 현대 의학을 시작하였다. 감염과 전염병의 원인이 세균임을 증명한 것이 파스퇴르였다. 그의 발견은 단순한 발견이 아닌, 이후 과학사에서 눈에 보이는 세계뿐만 아니라 미시 세계에 대한 연구를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그러한 생각은 후에 공기 중의 세균들을 죽임으로써 상처 부위의 감염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리스터의 멸균 외과술을 포함한 외과술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 일으켰으며, 세균에 대한 파스퇴르의 연구는 사실상 1870년부터 1940년까지의 세균학 및 의학의 흐름을 결정지었다. 이때부터 감염성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혈청 속의 백신을 사용하는 면역학이 사용되게 되었다.

파스퇴르와 페니실린의 역사적인 연결은 앰로스 라이트의 장티푸스 백신의 개발이었다. 파스퇴르는 실질적으로도 페니실린을 구현한 플레밍, 플로리, 체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플레밍과 플로리는 그를 자주 인용하였으며, 체인은 파스퇴르를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추대하였다.

3. 4. 3. 발견 과정 및 페니실린 신화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연구 중 우연히 오래된 포도상구균 배양 배지에서 곰팡이 군체를 발견하고, 이 곰팡이가 주변 세균의 성장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113][114][115] 하지만 당시 플레밍의 발표는 과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워드 플로리와 에른스트 체인이 페니실린을 치료약으로 대량 생산하기 전까지, 플레밍의 논문을 제외하고는 페니실린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페니실린 관련 기사와 책이 많아졌고, 플레밍의 발견 이야기는 거의 20년이 지나서야 처음 출판되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플레밍과 페니실린 발견에 대한 신화 같은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일반적인 페니실린 발견 신화는 플레밍의 실험실이 지저분했고, 그가 여름 휴가를 떠나면서 포도상구균 배양기를 둔 채 떠났고, 돌아와서 열린 배양 접시에서 푸른색 곰팡이와 그 주변의 죽은 포도상구균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는 곰팡이 추출물에 페니실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리치 캘더의 『생명의 구원자들』에는 창문으로부터 곰팡이가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추가되었지만, 캘더는 플레밍이 실제로 사용 가능한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루도비치는 『플레밍, 페니실린의 발견자』에서 곰팡이 포자가 우연히 플레밍의 배지에 떨어졌고, 플레밍은 이를 발견할 자질이 충분한 천재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로날드 헤어 교수는 플레밍이 곰팡이 접시에서 본 것을 잘못 해석했다고 밝혔다. 헤어 교수는 플레밍의 관찰에 대한 추적 실험 결과를 1968년에 발표하였다.[116] 체인 교수는 개막 연설에서 창문으로 들어온 곰팡이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며, 플레밍의 발견은 극히 희귀한 상황이 겹쳐야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플레밍이 실제로 발견한 것은 페니실린 자체가 아니라, 페니실린의 영향으로 특별한 경우에만 생길 수 있는 포도상구균의 자기 분해 작용이었다. 체인 교수는 플레밍이 포도상구균을 비이상적으로 오래 방치했고, 세균 성장 억제 효과가 아닌 세균 분해 현상을 발견한 것이라고 말했다.

1949년, 플로리와 체인을 포함한 옥스퍼드 팀은 플레밍의 업적을 "행운에 의해 페니실륨 노타툼이 실험 접시에 떨어져서 생긴 변화를 인지하고 그것을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후에 다른 사람들이 사용 가능하도록 곰팡이를 보관해 두었다는 것 정도이다."라고 평가하였다.

1927년까지 플레밍은 포도상구균(staphylococci)의 특성을 연구하고 있었다. 1928년, 그는 조셉 워릭 비거(Joseph Warwick Bigger)의 연구 이후 자연 상태에서 배양된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의 변이를 연구했다.[24] 1928년 9월 3일, 플레밍은 휴가를 마치고 실험실로 돌아왔다.[25] 휴가를 떠나기 전, 그는 배양 접시에 포도상구균을 접종하고 실험실 구석의 벤치 위에 두었다.[25] 돌아온 플레밍은 한 배양 접시가 곰팡이에 오염되었고, 곰팡이 바로 주변의 포도상구균 집락이 파괴된 것을 발견하고, "재밌네(That's funny)"라고 말했다.[26] 플레밍은 오염된 배양 접시를 그의 전 조수인 머린 프라이스(Merlin Pryce)에게 보여주었고, 프라이스는 그에게 "그렇게 해서 리소자임을 발견했잖아요(That's how you discovered lysozyme)"라고 상기시켰다.[27] 그는 그 곰팡이가 페니실리움(Penicillium) 속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P. chrysogenum이라고 추측했지만, 나중에는 P. rubens로 결정되었다.[28][29]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하고 실험한 실험실은 세인트 메리 병원(St. Mary's Hospital), 패딩턴(Paddington)에 알렉산더 플레밍 연구소 박물관(Alexander Fleming Laboratory Museum)으로 보존되어 있다. 곰팡이 오염원은 1966년 플레밍의 방 바로 아래에 있던 방에서 나온 것으로 밝혀졌다.[30][31]

플레밍은 순수 배양에서 곰팡이를 배양하여 배양액에 항균 물질이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많은 유기체에 대한 항균 효과를 조사했고, 그것은 포도상구균과 다른 많은 그람양성균(Gram-positive) 병원균에 영향을 미치지만, 그람음성균(Gram-negative)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몇 달 동안 "곰팡이 주스(mould juice)"라고 부른 후, 그는 1929년 3월 7일 항균 물질에 페니실린(penicilli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56]

플레밍은 1929년 2월 13일 의학연구클럽 앞에서 자신의 발견을 발표했지만,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25] 플레밍은 1929년 ''영국 실험병리학 저널''에 자신의 발견을 발표했지만,[32] 논문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대량 생산과 화합물 분리의 어려움으로 인해 1930년대에 페니실린은 거의 잊혀졌다.[47]

1936년까지도 페니실린에 대한 인식은 전무했다. 플레밍이 런던에서 열린 제2차 국제 미생물학회에서 페니실린의 의학적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33][34] 앨리슨은 "플레밍은 크게 실망했지만...그의 견해를 바꾸거나 페니실린 연구를 계속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습니다."라고 언급했다.[12] 1941년, ''영국 의학 저널''은 "[페니실린은] 다른 어떤 관점에서도 유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지 않았습니다."라고 보도했다.[35][36][30]

1942년, 순수 화합물로 생산된 페니실린은 여전히 부족하여 임상 사용이 불가능했다. 플레밍이 옥스퍼드 팀이 준비한 최초의 샘플 몇 개를 사용하여 연쇄상구균 수막염 환자를 치료했을 때, 성공적인 치료는 ''타임스''지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하지만 플레밍과 옥스퍼드 팀이 언급되지 않았고, 옥스퍼드가 약물의 원천으로 지목되었다. 라이트는 ''타임스''지 편집자에게 편지를 썼고, ''타임스''지는 플레밍을 인터뷰했지만, 플로리는 옥스퍼드 팀이 언론 보도를 추구하는 것을 금지했다. 결과적으로 플레밍만이 언론에 널리 알려졌는데,[93] 이는 그가 약물 발견과 개발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오해로 이어졌다.[94] 플레밍 자신은 이 사건을 "플레밍 신화"라고 언급했다.[95][96]

3. 4. 4. 작용 기작

페니실린베타-락탐 항생제의 한 종류이다. 베타-락탐 항생제는 항생제의 한 부류로, 박테리아 세포벽 합성을 방해하여 항균 작용을 한다. 베타-락탐 고리는 항균 작용에 필수적이며, 주위의 겉사슬은 항균 범위, 산에 대한 안정성, 흡수율 등 부가적인 성질을 결정한다.

3. 4. 5. E. B. 체인, H. W. 플로리의 페니실린 분리·정제, 대량 생산



1939년에 플레밍의 세균 균주 표본은 하워드 플로리가 이끄는 옥스퍼드 대학교 연구팀으로 넘어갔다.[117][118] 이 연구팀에는 기술적으로 재능이 뛰어난 에른스트 체인이 함께 있었다. 오랜 노력 끝에 이 연구팀은 록펠러 재단으로부터의 후원으로 세균 균주를 죽이는 물질을 확인하고 추출해내고자 하였다. 게르하르트 도마크가 1935년에 보인 프론토실의 주사가 연쇄구균에 의한 감염을 치료한 것은 그들의 연구에 영감을 주었으며, 이 사건은 침입하는 세균이 약으로부터 치료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플로리와 체인을 포함한 그의 연구팀은 빠르게 정제된 페니실린을 실험에 충분한 양만큼 추출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1년 안에 란셋지에 발표를 할 수 있었다. 페니실린의 주사는 다양한 감염 증세를 가진 환자에 대해 매우 높은 항생능력을 보였다. 옥스퍼드 팀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페니실린 수요에 맞추었다. 그들은 정부가 페니실린 생산에 필요한 체계를 형성하는 것을 도왔으며, 플로리는 1940년대에 미국의 제약회사들이 대량으로 페니실린을 생산하도록 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에 페니실린은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하였다.

옥스퍼드에서 어니스트 체인과 에드워드 아브라함은 항생제의 분자 구조를 연구하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페니실린의 정확한 구조를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이었다.[37][38] 1940년 연구팀이 첫 번째 연구 결과를 발표한 직후, 플레밍은 체인의 부서장인 하워드 플로리에게 며칠 안에 방문하겠다고 전화했다. 체인은 플레밍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맙소사!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라고 말했다.[39]

노먼 히틀리는 페니실린의 활성 성분의 산도를 바꿔 물로 다시 옮기는 방법을 제안했다. 이를 통해 동물 실험을 시작할 만큼 충분한 약물을 생산할 수 있었다. 옥스퍼드 연구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고, 한때 윌리엄 던 병리학교 전체가 페니실린 생산에 참여했다. 1940년 연구팀이 효과적인 최초의 안정적인 형태로 페니실린을 정제하는 방법을 개발한 후, 여러 임상 시험이 이어졌고, 그 놀라운 성공은 연구팀이 1945년 대량 생산 및 대량 유통 방법을 개발하도록 고무시켰다.[40][41]

플레밍은 페니실린 개발에 대한 자신의 역할에 대해 겸손했으며, 자신의 명성을 "플레밍 신화"라고 묘사하고 실험실에서의 호기심을 실용적인 약물로 변모시킨 플로리와 체인을 칭찬했다. 플레밍은 활성 물질의 특성을 처음으로 발견하여 페니실린이라는 이름을 짓는 특권을 얻었다. 그는 또한 12년 동안 원래 곰팡이를 보관하고 배양하며 배포했고, 1940년까지 페니실린을 만들 만큼 충분한 기술을 가진 화학자의 도움을 얻으려고 계속 노력했다. 헨리 해리스 경은 1998년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플레밍이 없었다면 체인도 없었을 것이고, 체인이 없었다면 플로리도 없었을 것이며, 플로리가 없었다면 히틀리도 없었을 것이고, 히틀리가 없었다면 페니실린도 없었을 것이다."[42] 페니실린의 발견과 그 이후의 처방약으로서의 개발은 현대 항생제의 시작을 알린다.[43]

1942년 중반까지 옥스퍼드 팀은 노란색 분말 형태의 순수한 페니실린 화합물을 생산했다.[65] 1943년 4월 5일 페니실린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위원회는 위원장으로 위어 경, 플레밍, 플로리, 퍼시벌 하틀리 경, 앨리슨, 제약 회사 대표를 포함했다. 주요 목표는 미국 회사와의 협력을 통해 페니실린을 신속하게 대량 생산하고, 약물을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군에게만 공급하는 것이었다.[12] 1944년 D-데이까지 연합군 부상자를 모두 치료할 만큼 충분한 페니실린이 생산되었다.[70]

3. 4. 6. 오늘날 페니실린의 활용 및 항생제 분야에 대한 영향

페니실린은 최초의 항생제일 뿐만 아니라, 많은 개량을 거쳐 오늘날에도 환자 치료에 유용하게 쓰이는 항생제이다. 투여 방법 개선, 내성 균주 대응, 작용 범위 확대를 위해 개량된 항생제를 페니실린계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페니실린계 항생제로는 페녹시메틸 페니실린, 벤질페니실린, 프로카인 벤진페니실린 등이 있다.

오늘날에는 페니실린 외에도 다양한 항생제가 존재한다. 페니실린은 베타-락탐계 항생제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베타-락탐계 항생제는 세균 세포막의 펩티도글리칸 교차연결 배열을 망가뜨려 세균을 죽인다. 이와 유사하게 세포벽을 파괴하는 항생제로는 세펨 계열 항생제가 있다. 또한, 세균 증식을 억제하는 마크로라이드 계열, 단백질 합성을 억제하는 테트라시클린 계열, 효소 생성을 방해하는 퀴놀론 계열 등 다양한 종류의 항생제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분류:페니실린 참조)

페니실린은 본래 자연계에 존재하는 항생 물질이었다. 초기에는 자연에서 발견된 물질을 주로 이용했지만, 화학 기술 발전으로 인공 합성이 가능해졌다. 구조를 일부 변형한 반합성, 완전히 새로운 항생 물질 합성 등을 통해 항생제의 종류와 폭이 크게 넓어졌다. 그러나 항생제 발전과 더불어 체내 부작용과 내성균 문제도 심각해지고 있다. 따라서 항생제 남용을 막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너무 적게 사용하거나 사용 기간이 짧으면 세균이 항생제 내성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일찍이 발견했다. 알름로스 라이트(Almroth Wright)는 실험 관찰 이전에 이미 항생제 내성을 예측하기도 했다. 플레밍은 여러 강연에서 페니실린 사용에 대한 주의를 당부했다. 1945년 6월 26일, 그는 "미생물은 페니실린에 대한 저항력을 키우도록 교육받고 있으며, 페니실린에 내성이 있는 많은 유기체가 배양됩니다… 이러한 경우, 페니실린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결국 페니실린 내성 유기체 감염으로 사망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도덕적으로 책임이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악이 막아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71]라고 경고했다. 그는 적절한 진단 없이 페니실린을 사용하지 말고, 사용 시에는 너무 적은 양이나 짧은 기간 동안 사용하지 않도록 경고했다. 이러한 조건이 박테리아의 항생제 내성을 유발하기 때문이다.[72]

1942년, ''황색포도상구균(S. aureus)''이 장기간 노출될 경우 페니실린 내성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 실험적으로 증명되었다.[73] 플레밍은 노벨 강연에서 임상 조건에서 페니실린 내성 가능성을 설명하며, "페니실린을 누구나 상점에서 살 수 있는 시대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지한 사람이 자신에게 쉽게 과소 투여하여 미생물을 치사량이 아닌 약물에 노출시켜 내성을 갖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20]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최초의 페니실린 내성 임상 사례가 보고되었다.[74]

4. 과학사적 의의: 우연적 발견

세렌디피티(Serendipity)는 '뜻밖의 행운'을 의미하며, 특히 과학 분야에서는 우연한 발견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101] 과학적 방법은 반복성과 재연성을 가지지만, 세렌디피티는 반복 가능하지도, 재연 가능하지도 않다.[101] 알렉산더 플레밍의 리소자임과 페니실린 발견은 세렌디피티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101] 리소자임은 플레밍이 자신의 콧물을 세균 배양 접시에 떨어뜨려 발견했고, 페니실린은 매우 희귀한 조건이 겹쳐 발생한 기적에서 발견되었다.[101]

이러한 과학적 발견이 항상 합리적 추론의 결과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101] 그러나 완전한 우연에 의한 과학적 세렌디피티는 없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101] 즉, 세렌디피티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준비되고 열린 마음(prepared and open mind)’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01] 루이 파스퇴르는 "우연은 준비된 자에게만 미소 짓는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101]

플레밍은 1920년대에 항균성을 가진 리소자임과 페니실린을 발견했는데, 두 발견 모두 우연, 즉 세렌디피티의 결과였다.[101] 플레밍은 페트리 접시에 세균을 배양하던 중 재채기를 했고, 며칠 후 재채기 점액이 떨어진 부분의 세균 콜로니가 파괴된 것을 발견하여 리소자임을 발견했다.[101] 1921년에 발견된 리소자임은 감염병 치료 효과는 없었지만, 현재 식품 첨가물이나 의약품으로 활용되고 있다.[101]

세계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 역시 우연한 발견이었다.[101] 플레밍의 실험실은 평소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발견의 계기가 되었다.[101] 1928년, 플레밍은 실험실에 흩어져 있던 실험 결과들을 정리하던 중 황색포도상구균이 가득한 배지에 오염된 곰팡이 콜로니를 발견했다.[101] 페트리 접시 위에서 곰팡이 주변의 세균 생육이 억제된 것을 확인한 그는 푸른곰팡이를 배양하여 항균 물질을 추출하고, 푸른곰팡이의 속명 ''Penicillium''을 따서 "페니실린"이라고 명명했다.[101]

4. 1. 세렌디피티

세렌디피티(Serendipity)는 '행운을 우연히 발견하는 능력'으로 정의되는 단어이며, 과학사에서는 완전한 우연으로부터 얻어지는 중대한 발견이나 발명을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101] 과학적 방법은 반복성과 재연성을 갖지만, 세렌디피티는 반복 가능하지도, 재연 가능하지도 않다.[101] 알렉산더 플레밍의 가장 큰 업적인 리소자임과 페니실린의 발견은 세렌디피티의 대표적 사례에 속한다.[101] 리소자임은 플레밍이 자신의 콧물을 세균배양접시에 넣어 발견하게 되었고, 페니실린은 매우 희귀한 조건이 겹쳐 발생한 기적에서 발견되었다.[101]

이러한 과학적 발견은 언제나 합리적 추론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101] 하지만 완전한 우연에 의한 과학적 세렌디피티는 없다는 것이 이러한 현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생각이다.[101] 즉, 세렌디피티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준비되고 열린 마음(prepared and open mind)’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01] 세렌디피티와 관련되어 루이 파스퇴르는 “우연은 준비된 자에게만 미소 짓는다.”라고 하였다.[101]

플레밍은 1920년대에 항균성을 가진 리소자임과 페니실린이라는 두 가지 물질을 모두 발견했지만, 이 두가지 모두 우연한 발견(세렌디피티(serendipity))이라고 전해진다.[101] 리소자임은 동물의 침이나 난백에 포함되어 있는 살균 작용을 하는 효소인데, 플레밍이 페트리 접시(Petri dish)에 세균을 도말한 후 재채기를 함으로써 발견되었다.[101] 며칠 후, 재채기의 점액이 떨어진 장소의 세균 콜로니가 파괴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 그의 실험 노트에 기록되어 있다. 1921년 발견된 리소자임은 감염병을 치유하는 힘은 없었지만, 현재는 식품 첨가물이나 의약품으로 사용되고 있다.[101]

세계 최초의 항생 물질로 유명한 페니실린도 우연히 발견되었다.[101] 플레밍의 실험실은 항상 어지러웠고, 그러한 사실이 그의 발견의 계기가 된 것 같다.[101] 1928년, 플레밍은 실험실에 흩어져 있던 임시 실험 결과들을 정리하던 중 황색포도상구균이 가득한 배지에 오염된 곰팡이 콜로니를 발견했다.[101] 페트리 접시 위의 세균 콜로니가 곰팡이 주변만 투명하고 세균의 생육이 저지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푸른곰팡이를 액체 배지에서 배양하여, 그 배양액을 여과한 여액에 이 항균 물질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푸른곰팡이의 속명인 ''Penicillium''에 따라 "페니실린"이라고 명명했다.[101]

4. 2. 예시

알렉산더 플레밍의 리소자임, 페니실린 발견은 세렌디피티의 대표적인 예시이다.[101] 과학사에서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알프레드 노벨의 다이너마이트 발명, 뢴트겐의 X선 발견, 제너의 종두법, 케쿨레의 벤젠 분자구조 발견 등 우연에 의한 발견 사례가 많이 존재한다.[101]

플레밍은 1920년대에 항균성을 가진 리소자임과 페니실린 두 가지 물질을 발견했는데, 이 둘은 모두 우연한 발견(세렌디피티)이었다.[101] 1921년에 발견된 리소자임은 플레밍이 페트리 접시에 세균을 도말한 후 재채기를 하면서 발견되었다.[101] 며칠 후, 재채기의 점액이 떨어진 장소의 세균 콜로니가 파괴된 것을 발견하였다.[101]

세계 최초의 항생 물질인 페니실린 역시 우연히 발견되었다.[101] 1928년, 플레밍은 실험실에 흩어져 있던 임시 실험 결과들을 정리하던 중 황색포도상구균이 가득한 배지에 오염된 곰팡이 콜로니를 발견했다.[101] 페트리 접시 위의 세균 콜로니가 곰팡이 주변만 투명하고 세균의 생육이 저지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푸른곰팡이를 배양하여 항균 물질을 발견하고 "페니실린"이라 명명했다.[101] 1929년 6월, ''British Journal of Experimental Pathology''지에 페니실린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101]

5. 수상 실적, 업적 및 영예

알렉산더 플레밍의 페니실린 발견은 현대 의학 및 약학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으며, 이후 항생제의 발전으로 이어져 수백만 명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80] 2000년이 다가오면서, 최소 3개 이상의 스웨덴 대형 신문사에서는 페니실린을 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꼽았으며, 몇몇 잡지에서는 페니실린의 발견이 이백만명 이상의 생명을 살렸다고 추정했다.

플레밍은 1945년 노벨 생리학·의학상하워드 플로리, 에른스트 보리스 체인과 공동 수상했다.[119] 노벨상 위원회는 "페니실린과 그것의 다양한 감염성 질환에 대한 치료 효과의 발견"을 수상 동기로 밝혔다.[119] 플레밍의 노벨상 메달은 1989년 스코틀랜드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었으며, 2011년 박물관 재개관 후 전시되고 있다.[81]

1945년 구스타프 5세(오른쪽) 국왕으로부터 노벨상을 수상하는 알렉산더 플레밍 경(가운데)


플레밍은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다양한 수상 및 영예를 얻었다.

  • 1909년 영국 왕립 외과 대학 펠로우(Fellow of the Royal College of Surgeons)
  • 1919년 영국 왕립 외과 대학 헌터리안 교수(Hunterian Professorship)
  • 1919년 왕립 외과 대학 명예 금메달(Honorary Gold Medal)
  • 1929년 Arris and Gale Lecturer
  • 1942년 런던 대학교 윌리엄스 줄리어스 미클 펠로우십(Williams Julius Mickle Fellowship)
  • 1943년 왕립 학회 회원(FRS)으로 선출[1]
  • 1944년 런던 왕립 내과 대학 펠로우(Fellow of the Royal College of Physicians)
  • 1944년 토론토 대학교 찰스 미클 펠로우십(Charles Mickle Fellowship)
  • 1944년 필라델피아 시 길드 존 스콧 메달(John Scott Medal)
  • 1944년 Knight Bachelor[82][83]
  • 1945년 에든버러 대학교 캐머런 상(Cameron Prize) (하워드 플로리와 공동 수상)
  • 1945년 왕립 내과 대학 목슨 메달(Moxon Medal)
  • 1945년 하버드 대학교 커터 강사(Cutter Lecturer)
  • 1946년 왕립 예술 협회 알버트 금메달(Albert Gold Medal)
  • 1947년 왕립 의학회 금메달(Gold Medal)
  • 1947년 미국 공훈 훈장(Medal for Merit)[8]
  • 1948년 스페인 알폰소 10세 훈장 그랜드 크로스(Grand Cross of Alphonse X the Wise)[84]
  • 교황청 과학 아카데미 회원[3]
  • 프랑스 공화국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크루아[8]
  • 그리스 봉황 훈장 그랑크루아[8]


1999년, ''타임''지는 플레밍을 20세기 최고의 인물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85] 2002년, 플레밍은 BBC의 영국 최고의 인물 100인 목록에 선정되었다.[87]

조셉 마누엘 베네딕토(Josep Manuel Benedicto)가 제작한 조각상 ''바르셀로나에서 알렉산더 플레밍 경에게'' (1956). 바르셀로나: 플레밍 박사 정원.


스페인 마드리드의 라스 벤타스 투우장 외부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88] 체코 프라하의 데이비체 지역에는 플레밍오보 나무스티(Flemingovo náměstí)라는 광장이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플레밍을 기념하는 페로 제도 우표


2009년, 클라이즈데일 은행이 발행한 새로운 시리즈의 지폐에 그의 이미지가 기념되었다.[89] 그는 STV가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스코틀랜드의 국민 시인 로버트 번스와 국민 영웅 윌리엄 월리스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90]

6. 비판 및 논란

6. 1. 과장된 업적

에른스트 체인하워드 플로리의 연구팀이 페니실린을 임상적으로 사용 가능한 상태로 만들고 대량 생산했지만, 대중에게는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에 대한 모든 것을 한 것처럼 알려져 있다.[93][94]

이는 당시 언론이 페니실린에 관심을 보일 때 옥스퍼드 팀의 플로리는 언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언론에 자신들의 업적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플레밍은 언론을 거부하지 않았고, 언론은 옥스퍼드 연구팀의 업적까지 플레밍의 것으로 묘사하며 플레밍의 페니실린 발견 신화를 만들어갔다.

1942년까지 순수 화합물로 생산된 페니실린은 여전히 부족하여 임상 사용이 불가능했다. 플레밍이 옥스퍼드 팀이 준비한 최초의 샘플 몇 개를 사용하여 연쇄상구균 수막염에 걸린 해리 램버트를 치료했을 때, ''타임스''지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주요 뉴스가 되었다. 라이트는 플레밍과 옥스퍼드 팀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플로리는 옥스퍼드 팀이 언론 보도를 추구하는 것을 금지했다. 결과적으로 플레밍만이 언론에서 널리 알려졌고, 이는 그가 약물의 발견과 개발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오해를 낳았다.[93][94] 플레밍 자신은 이 사건을 "플레밍 신화"라고 언급했다.[95][96]

6. 2. 윈스턴 처칠과의 관계

윈스턴 처칠의 아버지인 랜돌프 처칠 경이 플레밍의 아버지가 어린 윈스턴 처칠의 목숨을 구해준 후 플레밍의 교육비를 지불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94] 케빈 브라운(의학사학자)의 전기 ''페니실린맨: 알렉산더 플레밍과 항생제 혁명''에 따르면, 알렉산더 플레밍은 친구이자 동료인 안드레 그라티아에게 보낸 편지[98]에서 이것을 "놀라운 우화"라고 묘사했다.[99] 또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윈스턴 처칠을 구하지도 않았다. 처칠은 1943년 튀니지 카르타고에서 병이 들었을 때, 페니실린에 대한 경험이 없었던 찰스 윌슨(모런 경)이 설파제를 사용하여 구해주었다.[100] 1943년 12월 21일 ''데일리 텔레그래프''와 ''모닝 포스트''는 그가 페니실린으로 구조받았다고 보도했다. 그는 당시 연구 코드 M&B 693으로 알려진 새로운 설파제인 설파피리딘으로 구조받았는데, 이는 프랑스 그룹 로네-풀랭크의 자회사인 메이 앤 베이커 유한회사(에식스주 데이건햄 소재)가 발견하고 생산한 것이다. 후속 라디오 방송에서 처칠은 이 새로운 약을 "훌륭한 M&B"라고 언급했다.[100]

플레밍이 젊은 시절, 소년 시절의 윈스턴 처칠(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수상)이 연못에서 빠져 죽을 뻔한 것을 구해준 덕분에 처칠이 플레밍의 학비를 지원하여 그가 의사가 될 수 있었고, 다시 1943년 폐렴에 걸린 처칠을 페니실린으로 구해냈다는 "처칠을 두 번 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서 상을 수상했을 때 헨리 모건스턴 재무장관이 연설한 것을 계기로 퍼진 에피소드이며, 사실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처칠은 플레밍보다 7살 연상이며, 청년 플레밍이 소년 처칠을 구했다는 것은 나이가 반대로 되어 있다. 또한 1943년에 폐렴에 걸린 처칠을 구한 것은 페니실린이 아니라 설파제였다.[102]

7. 저서

알렉산더 플레밍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 ''Penicillin: Its Practical Application''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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